캘리포니아에서 엘니뇨로 인한 폭우와 해안 침수 가능성이 커지는 가운데, 물에 잠긴 전기차의 리튬이온 배터리에서 화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왔다.

특히 바닷물에 노출된 배터리는 부식과 합선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침수 직후가 아니라 며칠 또는 몇 주가 지난 뒤에도 불이 날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최근 높은 파도와 폭풍으로 해안 지역에 침수 피해가 발생하자 당국은 해변을 폐쇄하고 일부 주민을 대피시켰다.

이와 함께 라구나비치 소방서는 침수된 전기차 소유자들에게 별도의 안전 경고를 발표했다.

소방국은 “연기, 쉭쉭거리는 소리, 터지는 소리 또는 비정상적인 열이 감지되면 즉시 차량에서 멀리 떨어져 911에 신고하라”며 “차량을 직접 옮기거나 불을 끄려고 시도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차량 일부만 물에 잠겼더라도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운전하거나 충전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엘니뇨 겨울 앞둔 캘리포니아…해안 침수 우려

캘리포니아는 전국에서 전기차 시장의 중심지로, UC 데이비스 연구에 따르면 신차 판매 중 전기차 비중이 약 19%에 달한다.

이런 가운데 올겨울에는 강한 엘니뇨의 영향으로 기록적인 강수량과 추가 침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열대폭풍 레이철이 몰고 온 주말 폭풍 당시 뉴포트비치의 발보아 페닌슐라에는 바닷물이 밀려들어 주차된 차량과 도로를 주행하던 차량들이 침수된 물에 노출됐다.

전문가들은 침수 과정에서 배터리가 부식되거나 외부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손상이 발생했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전기차가 내연기관 차량보다 본질적으로 더 위험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침수 피해가 차량에 미치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휘발유 차량도 침수 시 전기 계통 고장, 부식, 곰팡이 등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량은 고전압 배터리 손상에 따른 화재 위험을 추가로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바닷물에 잠긴 배터리, 며칠 뒤에도 불붙을 수 있어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열폭주(thermal runaway)’다.

배터리 내부에서 열을 방출하는 반응이 연쇄적으로 일어나면서 온도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하는 현상이다.

일단 화재가 발생하면 불길이 빠르게 번지고 진화도 어려울 수 있다.

배터리가 침수되면 물이 전기 회로에 영향을 미쳐 합선을 일으킬 수 있다.

특히 바닷물은 담수보다 전기가 잘 통하기 때문에 전류가 흐를 가능성을 높이고 배터리 부식도 촉진한다.

이로 인해 침수 당시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더라도 시간이 흐른 뒤 화재가 발생할 수 있다.

아이다호국립연구소 연구진은 2022년 허리케인 이언으로 침수 피해를 입은 전기차 36대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는 미 도로교통안전국(NHTSA)과 함께 진행됐다.

도로교통안전국은 당시 보고서에서 일부 차량은 평판형 견인차에 실려 이동하던 중 불이 났다고 설명했다.

2024년 허리케인 헐린으로 발생한 침수 피해와 관련해서도 전기차 11대와 리튬이온 배터리 48개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집계가 나왔다.

일부 화재는 주택으로 번졌다.

이 같은 위험은 전기차가 아직 널리 보급되기 전부터 관찰됐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 이후 뉴저지주 포트 뉴어크의 항만 부두에서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 고급차인 피스커 카르마 16대가 화재로 불탔다.

피스커 오토모티브는 교통 당국의 감독 아래 진행한 자체 조사에서 배터리의 염분 부식이 합선을 일으켰으며, 기존 결함 때문은 아니었다고 밝혔다.

지난달(9월)에도 미 동부 해안을 강타한 노리스터 폭풍으로 뉴저지 해안 지역에 심각한 침수가 발생한 뒤 화재 12건이 보고됐다.

배터리 위치와 침수 높이가 손상 여부 좌우

전기차 배터리는 밀폐된 케이스에 들어 있지만, 물에 완전히 잠기는 상황까지 견디도록 완전 방수 처리된 것은 아니다.

기계공학과 전기차 개발 분야의 배경을 가진 미시간주 자원봉사 소방 캡틴 패트릭 더럼은 물이 차량 하부를 몇 인치 정도 스치는 수준이라면 문제가 없을 가능성이 있지만, 침수 수위가 배터리 보호 구조에 영향을 미쳤다면 위험 신호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현대(modern)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량은 차체 바닥에 배터리 팩이 장착되는 경우가 많다.

차량 측면 하부의 구조물인 ‘로커 패널’은 바닥에 있는 배터리 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더럼은 물이 이 구조물 안쪽까지 들어갔다면 주의가 필요하다며 “차량 바닥 매트나 바닥판이 젖었다면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차량 브랜드와 관계없이 전기차와 하이브리드 차량 모두 침수에 따른 배터리 손상 위험이 있다.

손상 가능성은 배터리의 장착 높이와 물이 얼마나 높이까지 차올랐는지 등에 따라 달라진다.

더럼은 배터리가 물에 잠겼다면 위험성이 높고, 특히 바닷물에 잠겼다면 상황이 더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침수 여부가 확실하지 않더라도 배터리가 물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다면 차량을 위험 요소로 간주하고 전문적인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설명이다.

침수 차량, 시동 걸거나 충전하지 말아야

차량이 침수됐다면 소유자는 보험사에 연락하고 전문 견인 서비스를 이용해 전기차 또는 하이브리드 차량 정비 자격을 갖춘 정비사에게 점검을 받아야 한다.

차량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여도 임의로 운전하거나 충전해서는 안 된다.

대피 과정에서 침수된 전기차를 무리하게 몰고 물을 통과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

부득이하게 차량을 남겨두고 대피해야 한다면 충전기에 연결된 상태로 두지 말아야 한다고 더럼은 조언했다.

또한 차량은 다른 건물이나 차량에서 최소 50피트 떨어진 곳에 주차하고, 배터리 충전량은 30% 미만으로 유지할 것을 권고했다.

연방재난관리청(FEMA)은 다음과 같은 추가 안전 수칙을 제시했다.

  • 가정이나 차고에 있는 리튬이온 배터리가 침수됐을 가능성이 있다면 지역 소방서에 알린다. 전기차뿐 아니라 전기자전거, 골프 카트 등 대형 배터리를 사용하는 제품도 포함된다.
  • 침수됐을 가능성이 있는 차량과 기기는 충전기에서 분리한다.
  • 침수 차량은 건물 밖 개방된 공간으로 옮기되, 다른 건물이나 차량에서 최소 50피트 떨어진 곳에 둔다.
  • 침수된 리튬이온 배터리 제품은 일반 쓰레기나 재활용 수거함에 버리지 않는다. 잔해와 건물에서 최소 6피트 떨어진 금속 용기 또는 불연성 용기에 보관하고, 일반 폭풍 피해 잔해와 함께 수거하도록 내놓지 말아야 한다. 폐기는 관련 안전 지침을 따르는 적절한 시설을 통해 진행해야 한다.

전기차뿐 아니라 전동공구, 낙엽 송풍기, 개인용 전자기기 등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하는 생활용품도 침수 후에는 주의해야 한다.

소형 배터리 화재는 전기차 배터리 화재보다 규모가 작을 수 있지만, 부적절하게 버린 배터리로 쓰레기 수거 차량이나 재활용 시설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강한 엘니뇨와 해수 온도 상승으로 올겨울 캘리포니아에서는 특히 만조 시 해안 침식과 침수 피해가 커질 가능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침수 위험 지역의 운전자들이 폭풍이 오기 전에 차량을 고지대로 옮기는 등 사전 대비에 나서야 한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