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돈을 아끼기 위해 찾던 중고 의류가 이제는 헐리우드 스타와 패션 인플루언서들이 즐겨 찾는 ‘스타일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특히 캘리포니아의 기술 기업들이 중고 의류를 사고파는 방식을 바꾸면서 중고 패션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LA타임스가 18일 보도했다.
맥킨지의 ‘패션산업 현황(State of Fashion)’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중고 의류 시장 규모는 최근 5년 사이 20% 성장해 2,4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샌프란시스코의 리얼리얼(The RealReal), 레드우드 시티의 포시마크(Poshmark), 오클랜드의 스레드업(ThredUp) 등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기업들이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중고 제품의 등록부터 검색, 결제, 배송까지 편리하게 만들면서 시장을 크게 키웠다.
리얼리얼 창업자 라티 사히 레베스크는 중고 거래가 기존 소비 방식을 기술로 확장한 대표적인 캘리포니아식 혁신이라고 설명했다.
신뢰할 수 있는 인증 시스템과 물류, 데이터, 기술을 결합하면서 중고 제품을 수백만 명이 일상적으로 구매하는 상품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중고품 찾아다니는 ‘보물찾기’가 새로운 재미
온라인 중고 쇼핑의 매력은 단순히 가격이 싸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환경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유행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을 수 있다는 점도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특히 온라인 플랫폼에서 희귀하거나 오래된 제품을 찾아내는 과정 자체를 즐기는 소비자가 늘었다.
원하는 물건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느끼는 ‘보물찾기’의 재미도 중고 패션의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USC 학생인 줄리아 호는 수개월 동안 여러 온라인 사이트를 뒤진 끝에 자신이 찾던 1990년대 구찌 시계를 샌호세에서 시작된 이베이에서 좋은 가격에 발견했고, 주문한 시계는 약 3주 뒤 양호한 상태로 도착했다.
줄리아 호는 원하는 물건을 좋은 가격에 발견했을 때 “확실히 도파민이 분출되는 느낌이 있다”고 전했다.
실리콘밸리 기술이 중고 패션을 키웠다
캘리포니아의 중고 패션 산업은 수년 전부터 기술 발전과 함께 성장해왔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애리아에서 불과 50마일 이내에 설립된 여러 중고 패션 플랫폼이 온라인 거래의 편의성을 높이면서 기존 패션업계의 소비 방식을 바꿨다.
초기에는 Craigslist와 이베이 같은 온라인 장터가 다양한 물건을 인터넷에서 사고팔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후 패션 전문 플랫폼들이 셀러와 바이어를 연결하면서 상품 인증과 결제, 배송 시스템 등을 강화했고 소비자들이 중고 명품도 비교적 안심하고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한정판 제품도 중고 시장의 성장을 가속했다. 나이키와 Supreme 등 패션 브랜드들이 한정 수량 제품을 출시하면서 정가에 제품을 구하지 못한 소비자들이 리셀 플랫폼으로 몰렸다.
인기 운동화와 협업 티셔츠 등이 정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거래되면서 리셀 시장 자체가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소셜미디어가 ‘중고=멋’이라는 인식 확산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도 중고 패션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했다.
LA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인플루언서 엠마 체임벌린의 빈티지샵 쇼핑 영상이 인기를 끌면서 중고 의류를 찾아다니는 모습 자체가 콘텐츠가 됐다.
다른 크리에이터들도 중고 매장에서 구한 옷을 새로운 스타일로 조합하거나 손질해 독특한 패션으로 만드는 영상을 공유하면서 젊은 소비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흐름을 더욱 빠르게 만들었다.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면서 옷장을 정리해 사용하지 않는 옷을 판매하려는 수요가 증가했고, 중고품 판매가 부업이나 본업이 되는 사례도 나타났다.
스레드업의 제임스 라인하트 CEO는 2009년 회사를 설립하면서 누구나 집에 있는 옷을 간편하게 보내고, 정리된 수많은 중고 의류를 온라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시장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했다.
당시만 해도 중고 의류는 옷장 구석에 쌓여 있는 낡은 옷이나 헌 옷 가게의 옷걸이를 뒤지는 이미지가 강했다.
하지만 이제는 중고품을 사는 데 대한 거부감 자체가 크게 줄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명품 중고시장까지 급성장
2011년에는 개인 간 거래에 초점을 맞춘 포시마크와 명품 중고품 및 정품 인증 서비스를 내세운 리얼리얼이 등장했다.
두 회사는 이후 기업공개를 거쳤으며, 포시마크는 2023년 한국 네이버에 12억 달러에 인수됐다.
이베이도 패션 중고시장과 정품 인증 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올해(2026년) 7월에는 런던에 기반을 둔 젊은층 중심의 중고 패션 플랫폼 디팝(Depop)을 12억 달러에 인수했다.
맥킨지에 따르면 중고 패션 시장은 전통적인 소매시장보다 약 4배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으며 연평균 성장률은 약 12%에 달한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중고 쇼핑은 더 이상 궁색한 소비 방식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형 소매점에서 비슷한 디자인의 제품을 구입하는 것보다 빈티지 의류를 통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드는 것이 더 매력적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레드카펫에도 등장한 빈티지 패션
이 같은 변화는 패션계에서도 확인된다.
헐리우드 배우 오데사 아지온은 이달(9월) 열린 에미상 시상식에서 1996년 장 폴 고티에가 디자인한 슈트를 입고 등장해 베스트 드레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패션업계가 오랫동안 ‘새로운 것’을 중심으로 움직여 왔지만, 중고 시장의 확산은 이런 공식도 바꾸고 있다.
몇 년 전 선보인 가방이나 20년 된 의류가 최신 런웨이 제품 못지않게 소비자들에게 주목받는 것이다.
리얼리얼의 레베스크는 중고 거래가 패션을 ‘새 제품이냐 아니냐’라는 직선적인 개념에서 벗어나게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장세에도 수익성은 과제
다만 중고 패션 플랫폼들이 해결해야 할 과제도 있다.
상품 하나하나를 분류하고 촬영하고 인증하고 보관한 뒤 배송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소매업보다 운영이 복잡하고 비용 부담도 크다.
맥킨지의 아니타 발찬다니 선임 파트너는 중고 패션 산업이 아직 성장 단계에 있다며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비용을 더 낮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올해 리얼리얼 주가는 35% 이상 하락했고, 스레드업 주가도 60% 넘게 떨어졌다.
스레드업은 지난달(8월) 매출 전망을 발표한 뒤 투자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주가가 급락했다.
AI로 비용 낮추고 검색은 더 편리하게
업체들은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
스레드업은 AI를 활용해 물류창고로 들어오는 수백만 벌의 의류를 분류하면서 작업 속도를 높이고 운영비를 줄이고 있다.
리얼리얼은 올해 ‘마이클로젯(MyCloset)’이라는 AI 기능을 선보여 이용자가 자신의 옷장에 있는 의류의 가치를 추적할 수 있도록 했다.
포시마크는 지난 6월 베니스에 기반을 둔 AI 쇼핑 도우미 업체 실버(Silvr)와 손잡고 1억 개가 넘는 상품 정보를 AI 플랫폼에 제공하기로 했다. 이용자가 원하는 스타일의 의상을 보다 쉽게 검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중고 패션업체들은 앞으로 젊은 세대가 소비의 주축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의 지출 가운데 더 많은 부분이 중고 의류 시장으로 이동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스레드업의 라인하트 CEO는 이 세대를 ‘리세일 네이티브(resale native)’라고 표현했다. 중고 제품을 사고파는 것이 특별한 소비 방식이 아니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자리 잡은 세대라는 의미다.
한때 ‘헌 옷’으로 불리며 절약의 상징이었던 중고 패션이 이제는 개성과 희소성, 지속가능성, 기술이 결합된 새로운 패션 소비 방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평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