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화하고 건조한 기후로 '살기 좋은 천국'이라 불리던 남가주의 대명사 '완벽한 날씨'가 이상 기후 현상으로 흔들리고 있다.

남가주는 오랫동안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자랑해왔다.

과거 철도회사들은 병약한 사람들이 회복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후라며 LA를 홍보했고, 비 때문에 스포츠 경기가 취소되거나 로즈 퍼레이드에 우산이 등장하는 일조차 드물어 큰 뉴스가 될 정도였다.

여름철 기온이 높아져도 '적어도 건조한 더위'라는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올해(2026년)는 상황이 크게 달라졌다.

이번 주 남가주를 뒤덮은 높은 습도는 플로리다와 멕시코만 연안 지역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력했다.

일부 기상 전문가들은 이번 고온다습한 날씨가 현대 기상 관측 역사상 남가주에서 경험한 가장 심각한 습도 현상 가운데 하나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46년 만에 가장 습한 여름

UC 기후과학자 대니얼 스웨인은 “남가주 해안 지역에서 관측된 습도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다”며 “올여름 일부 지역에서는 기록상 가장 습한 여름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스웨인은 지난달(8월) 말까지의 자료를 토대로 산타바바라, LA, 롱비치, 샌디에고 공항에서 측정된 이슬점(dew point) 평균을 분석한 결과, 1980년 이후 올해 여름이 가장 높은 습도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46년 이상 만에 가장 습한 여름을 기록한 것이다.

이슬점은 공기 중 수분량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지표로, 플로리다 탬파 기상청에 따르면 이슬점이 60도 이하이면 비교적 쾌적하고, 65도를 넘으면 후텁지근하게 느껴진다.

70도를 넘으면 매우 습하고 불쾌한 수준이며, 75도 이상이면 견디기 힘든 수준의 습도로 분류된다.

실제로 어제(8일) 정오 직후 롱비치와 헌팅턴 비치, 뉴포트 비치에서는 이슬점이 76도까지 올라갔다.

같은 시각 플로리다 올랜도와 뉴올리언스에서 관측된 이슬점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높은 습도는 체감온도를 크게 높이는데, 공기 중 수분이 많으면 땀이 제대로 증발하지 않아 몸이 열을 식히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건조한 더위’ 지켜주던 남가주 기후 무너져

남가주의 비교적 온화한 여름 날씨에는 차가운 태평양의 냉각 효과와 산맥, 사막과의 지리적 위치, 그리고 일반적으로 열대성 수증기가 유입되지 않는 기압 패턴 등이 영향을 미친다.

평소에는 오전에 사막의 건조한 공기가 LA 분지로 유입되고 오후에는 상대적으로 차가운 바다 위의 공기가 내륙으로 들어오는 순환이 습도를 낮추는 역할을 한다.

여름철 남가주에 형성되는 고기압 역시 따뜻하지만 건조한 날씨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

또한 남가주 앞바다는 멕시코만이나 미 동부 해안보다 훨씬 차갑다.

9월 산타모니카 해안의 평균 수온은 약 67.9도인 반면 플로리다 탬파 베이는 약 86.3도에 달한다.

그러나 올해는 남가주의 습도를 억제해왔던 여러 요인이 동시에 약화됐다.

스웨인은 “평소 우드랜드힐스에서 110도까지 올라가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며 건조한 날씨에서는 땀이 증발하고 바람이 불면서 체온을 식힐 수 있지만, 습도가 높으면 이러한 냉각 효과가 크게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특히 LA 중부와 사우스 LA에서는 매우 높은 열지수가 나타나고 있는데, 이 지역에는 가정에 에어컨이 없는 주민들도 많아 우려가 더욱 크다는 지적이다.

허리케인 마리와 뜨거워진 바다가 원인

이번 극심한 습도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허리케인 마리의 잔해다.

마리는 이례적으로 활발한 동태평양 허리케인 시즌에 발생했으며, 엘니뇨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마리의 잔해가 남서쪽에서 남가주로 열대성 수증기를 끌어오면서 평소보다 훨씬 습한 공기가 유입됐다.

여기에 이 시기 남가주로 들어오는 몬순성 수증기까지 더해지면서 습도가 더욱 높아졌다.

마리의 잔해는 남가주 곳곳에 소나기와 뇌우를 유발했으며, 캘리포니아 중부 해안과 샌프란시스코 베이 애리아까지 이어진 고온 현상에도 영향을 미쳤다.

바다 자체가 평년보다 훨씬 따뜻해진 것도 문제다.

NOAA 자료에 따르면 이례적으로 강한 해양 열파가 캘리포니아 해안 전역으로 확산됐다.

스웨인은 특히 멕시코 바하 칼리포르니아 인근 해수온이 평년보다 약 10도나 높은 수준이라며 “비정상적으로 따뜻하다”고 지적했다.

LA 앞바다 역시 관측 사상 가장 따뜻한 수준에 근접했고, 샌프란시스코 서쪽 해역도 역대 최고 수준에 가까운 수온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온·고습에 건강 위험도 커져

높은 기온과 습도가 동시에 나타나면서 폭염으로 인한 건강 위험도 커지고 있다.

LA카운티 보건당국은 주민들에게 열탈진과 열사병 증상을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주요 증상은 어지럼증, 메스꺼움, 빠른 심장박동, 혼란 등이다.

LA카운티 보건국장 먼투 데이비스 박사는 “미국에서는 폭염으로 인한 사망자가 홍수와 폭풍, 낙뢰를 합친 것보다 많다”며 노년층과 어린이, 야외 근로자, 운동선수, 만성질환자 등이 특히 위험하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이번처럼 고온과 습도가 결합한 현상이 남가주에서 앞으로 더 자주 나타날 가능성에도 주목하고 있다.

스웨인은 “이번 현상이 올 10년 동안 남가주에서 발생할 가장 극심한 고온다습 현상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며 앞으로 이보다 더 심한 상황이 나타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올겨울 더 큰 해안 피해 우려

겨울철 해안 재해에 대한 우려도 커지고 있다.

최근 남가주 해안에서는 높은 파도와 만조로 이미 상당한 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기상당국은 추가적인 해안 침식과 침수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스웨인에 따르면 현재 남가주 해안의 해수면은 평년보다 약 6~10인치 높은 상태다.

여기에 높은 만조와 허리케인 마리의 영향으로 강한 파도가 겹치면서 해안 침수 위험이 크게 높아졌다.

기상당국은 해안 침식과 해변 및 주차장 침수, 남쪽을 향한 취약한 해안 지역의 해수 유입, 강한 이안류로 인한 익사 위험 등을 경고하고 있다.

강한 엘니뇨·켈빈파까지 변수

올겨울 매우 강한 엘니뇨가 예상되는 것도 또 다른 변수다.

엘니뇨가 발생하면 ‘켈빈파’라고 불리는 따뜻한 해수의 이동이 나타난다.

현재 멕시코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켈빈파가 이달(9월) 말 캘리포니아에 도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켈빈파는 바닷물의 온도와 해수면을 일시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올가을과 겨울에도 한두 차례 추가적인 켈빈파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어 여러 차례의 해수면 상승이 연이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스웨인은 특히 11월부터 내년 1월 사이에 나타날 ‘슈퍼 킹타이드’와 켈빈파, 높은 해수온이 겹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강한 엘니뇨와 이미 높아진 해수면이 결합할 경우 남가주 해안의 침수와 침식 피해가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완벽한 날씨’의 시대, 끝나는 신호?!

여기에 인간이 초래한 지구온난화로 해수 온도가 상승하고 빙상이 녹으면서 장기적인 해수면 상승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웨인은 바다가 따뜻해질수록 열팽창이 발생하고 대륙 빙상이 더 많이 녹으면서 해수면이 상승한다고 설명했다.

과거 ‘완벽한 날씨’로 불리며 수많은 사람을 남가주로 끌어들였던 온화하고 건조한 기후가 이제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올여름 남가주에서 나타난 기록적인 습도는 단순히 불쾌한 날씨를 넘어, 기후 변화와 해수 온도 상승, 강한 엘니뇨가 결합할 경우 앞으로 남가주가 어떤 기후를 경험하게 될지를 보여주는 경고 신호가 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