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를 앞세워 전라남도 광주에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계획을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반도체 굴기'가 미국 생산 시설 건설을 강하게 압박해온 트럼프 행정부와의 새로운 마찰 지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지적하고 나섰다.
사업 규모: 미국 반도체법의 10배
지난 6월 29일 한국 이재명 대통령은 삼성전자, SK 하이닉스와 함께 광주·전남 지역에 총 800조 원(약 5,200억 달러) 규모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는 공공-민간 투자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는 각각 두 개씩 총 네 개의 반도체 제조 공장을 서남부 지역에 건설할 계획이다. 이는 현재 두 회사의 주력 생산기지인 경기도 권역을 넘어 생산 역량을 다변화하는 시도다.
이 투자 규모는 미국이 자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해 투입한 반도체법(CHIPS Act) 예산 520억 달러의 무려 10배에 달한다. 별도로 충청권 반도체 패키징 허브에도 81조 원이 추가 투입될 예정이다.
부지는 광주의 옛 군사 공군기지가 유력하며, 첫 양산 목표 시점은 2030년 6월이다. SK 그룹 최태원 회장은 지난 10월 9일 직접 부지를 시찰하며 공사 속도를 높일 것을 강조했다.
왜 광주인가
한국 정부는 AI 반도체 호황이 가져다줄 경제적 혜택이 수도권을 넘어 서남부 지역으로도 퍼지기를 원하고 있다. 광주 허브는 수도권 집중에 대한 압력을 해소하는 역할도 겸한다.
SK 하이닉스 측은 광주가 전력, 용수, 토지, 재생에너지 등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전략적 조건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다만 최태원 회장은 현재 경기도 용인의 반도체 클러스터를 구축하는 데만 9년이 걸렸다며 이번 사업 역시 장기적 관점에서 추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의 분노를 살 수 있다
문제는 이 거대한 국내 투자 계획이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올해 초 미국에 생산 시설을 짓지 않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에 최대 100% 관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이는 사실상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를 겨냥한 발언으로 업계에서는 해석했다.
전문가들은 관세와 무역 정책으로 외국 기업의 미국 투자를 유도해온 트럼프 행정부가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대규모 한국 내 투자 계획을 긍정적으로 볼 리 없다고 경고하고 있다.
블룸버그도 이 광주 허브 계획이 미국-한국 관계의 새로운 긴장 지점이 될 수 있다고 지목했다.
삼성·SK 하이닉스의 딜레마: 한국이냐, 미국이냐
두 회사는 현재 한국과 미국 압박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남부 텍사스주 테일러에, SK 하이닉스는 중부 인디애나 주 웨스트 라파예트에 대규모 시설을 건설 중이다. 미국 정부의 요구에 화답하는 행보다.
SK 그룹 최태원 회장은 미국 전단 공장 추가 건설이 어려운 이유로 미국의 건설 비용이 한국의 약 두 배에 달한다는 점을 직접 언급했다.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 모두 이미 막대한 한국 내 투자 프로그램을 진행 중인 상황에서 미국에 메모리 공장까지 추가로 짓는 것은 엄청난 신규 자본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점이 딜레마를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SK 하이닉스는 AI 주도의 메모리 호황을 미국과의 협상에서 지렛대로 활용하며, 자국 투자를 워싱턴과의 협상 카드로 삼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AI 수요가 만든 기회… 리스크도 함께
이번 투자의 배경에는 AI 반도체 수요의 폭발적 성장이 있다.
SK 하이닉스는 고대역폭 메모리(HBM)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며 올해(2026년) 6월 삼성전자를 제치고 25년 만에 한국 시가총액 1위 기업에 올랐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만 해도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53조 7,000억 원에 달했다.
두 회사가 AI 메모리 수요가 2027년 이후까지 강세를 이어갈 것으로 베팅하는 이유다. 그렇지만 막대한 투자 결정은 미국의 관세 위협, 중국 수출 통제, 글로벌 공급망 재편이라는 복잡한 지정학적 방정식과 맞물려 있어 향후 행보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