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성운동을 대표해 온 작가이자 활동가 글로리아 스타이넘이 향년 92세로 별세했다. 최근 건강이 악화됐던 스타이넘은 뉴욕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사망 소식은 고인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해졌다.
스타이넘은 1960년대부터 60여 년 동안 여성의 권리와 평등을 위해 활동하며 미국 현대 여성운동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저널리스트로 경력을 시작한 그는 1963년 뉴욕의 플레이보이 클럽에 이른바 '바니걸'로 위장 취업해 여성 종업원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성적 대상화 문제를 폭로하는 잠입 취재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여성들의 낙태권 관련 집회와 토론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스타이넘 자신도 22살 때 불법 낙태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공개한 바 있으며, 여성의 재생산 권리와 자기 결정권을 평생 주요 의제로 다뤘다. 2022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헌법상 권리로 인정했던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폐기했을 당시에도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권에서 평등하지 않다면 민주주의라고 할 수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스타이넘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는 1972년 창간한 여성주의 잡지 '미즈(Ms.)'다.
당시 영어권 사회에서는 남성과 달리 여성을 결혼 여부에 따라 '미스(Miss)'와 '미시즈(Mrs.)'로 구분하는 관행이 일반적이었다. 스타이넘과 여성운동가들은 결혼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을 독립된 개인으로 부르는 호칭인 '미즈(Ms.)'를 확산시켰고, 이후 이 표현은 미국 사회의 공식적인 여성 호칭으로 폭넓게 자리 잡았다.

가운데를 가른 긴 머리와 큰 안경으로도 잘 알려진 스타이넘은 대학 캠퍼스와 지역사회 행사, 집회와 행진에 직접 참여하면서 여성운동을 대중적인 사회운동으로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언론계가 여성운동을 제대로 다루지 않던 시절 직접 대중 앞에 나서 연설하기 시작했다.
스타이넘은 훗날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했지만, 여성운동에 관한 기사를 언론이 받아주지 않아 직접 대중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2015년 인터뷰에서도 전화나 인터넷만으로는 사람 사이의 진정한 공감에 한계가 있다며 직접 같은 공간에서 만나고 대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스타이넘은 80대와 90대에 접어든 뒤에도 세계 각지를 다니며 여성의 권리뿐 아니라 평화와 인권, 인종과 계층 간 평등 문제에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말년에도 젊은 세대와의 연대와 교육 활동을 이어가며 평화운동가들과 함께 그림책을 출간하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평생 자신의 외모가 활동과 메시지보다 더 주목받는 현실에 불편함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스타이넘은 여성의 권리를 개인의 문제가 아닌 미국 사회의 핵심적인 정치·사회 의제로 끌어올린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플레이보이 클럽 잠입 취재와 '미즈' 창간, 낙태권과 평등권 운동 등은 이후 미국 여성운동의 방향과 대중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타이넘은 생전 "대중이 나를 아는 것보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겼으며, 20세기 후반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미국 여성운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