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약값을 올린다는 비판을 받아온 대형 약국 재벌에 대한 반독점 규제 바람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어오고 있다. 바로 보수적인 공화당 텃밭, 미국 남부다.
공화당이 대기업 해체에 나선 이유
테네시 주의 빌 리 주지사와 아칸소 주의 새러 허커비 샌더스 주지사 등 공화당 소속 주지사들이 잇달아 대형 약국을 규제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이 법안의 핵심은 명확하다. 약국(Pharmacy)과 약국급여관리업체, PBM(Pharmacy Benefit Manager)을 동시에 소유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이다. PBM은 보험사를 대신해 제약사와 약가를 협상하는 중간 사업자로, CVS 케어마크, 옵텀Rx, 시그나의 익스프레스 스크립츠 3사가 미국 시장의 약 80%를 장악하고 있다.
CVS 헬스는 PBM과 약국, 보험사 에트나를 모두 소유한 수직계열화의 상징이다. 이 법이 시행되면 CVS는 테네시주에서 134개, 아칸소주에서 23개 약국을 폐쇄하거나 매각해야 한다.
공화당이 대기업 분할에 나선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포퓰리즘 노선과 약값에 지친 민심이 맞닿은 결과다. 아칸소 주의 이번 법안 발의자인 공화당 소속 제러마이어 무어 연방하원의원은 "평범한 미국 시민들 경우 정부나 이런 독점 기업에 치이는 것에 질렸다"며 "이들 대형 약국들은 너무 오랫동안 환자들을 착취해왔다. 내가 보기엔 전형적인 정경유착"이라고 비판했다.
현재 적어도 10개 주(그 중 7개가 공화당 주도 주)가 유사한 법안을 추진 중이다. 연방 차원에서는 공화당 포퓰리스트 조시 홀리 연방상원의원과 민주당 엘리자베스 워런 연방상원의원이 손을 잡고 '환자 우선, 독점 금지법(Patients Before Monopolies Act)'을 공동 발의하는 이색적인 초당파 연대도 이뤄졌다.
CVS의 반격: "폐점 쓰나미가 온다"
CVS 헬스는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데이비드 휘트랩 CVS 헬스 대변인은 "기업을 강제로 분리하는 것은 오히려 소비자 비용을 높이고, 의료 접근성을 떨어뜨리며, 미국 의료 시스템 전체를 사모펀드의 먹잇감으로 만들 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CVS는 테네시 주 법이 시행되면 고용주 건강보험 비용이 연간 1억 8,000만 달러 증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칸소 주에서는 약 34만 명의 환자 서비스가 끊기고, 500개 이상의 일자리가 사라지며 6,600만 달러의 비용이 추가된다고 경고했다.
유나이티드헬스 그룹은 특수 약국 체인 '지노아 헬스케어(Genoa Healthcare)'를 통해 정신건강·행동장애 환자를 돌보고 있는데, 이 법이 시행되면 아칸소와 테네시 주의 취약 계층 환자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지노아 대표 브렛 에델슨 CEO는 "테네시 주 존슨 시티 약국은 지역사회 정신건강 허브인데, 이곳이 문을 닫으면 수천 명의 환자가 갈 곳을 잃는다"고 호소했다.
법원의 손에 달린 운명
현재 두 주의 법안은 모두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며 시행이 중단된 상태다. PBM들은 이 법이 주 간 통상을 방해하고 외부 기업을 역차별한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아칸소 주에서는 연방 법원이 잠정 금지 명령을 내렸다.
법률 전문가들은 주 정부가 연방 헌법의 '통상조항(Commerce Clause)'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칸소 주 약사협회 존 빈슨 CEO는 "한 주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다른 주에서 나올 수 있고, 항소법원 간 판결이 엇갈리면 결국 대법원까지 갈 수 있다"며 싸움이 장기전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했다.
환자에게 좋은 건 누가 결정하나
법안 지지자들은 PBM이 환자들을 자사 약국으로 유도하고 독립 약국에는 낮은 수가를 책정해 경쟁을 차단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FTC 보고서는 PBM 소유 약국이 특정 약품에 더 높은 가격을 청구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USC 쉐퍼 연구소에 따르면 최근 몇 년 사이 소규모 독립 약국 폐업률이 2배 이상 높아졌고, 독립 약국은 대형 체인 약국보다 폐업 위험이 2배 이상 높다.
익명을 요청한 테네시 주 동부의 한 독립 약국 운영자는 "약 한 번 조제할 때마다 100달러씩 손해를 보면서 윤리적 딜레마에 빠진다. 이 환자를 돌려보내야 하나, 아니면 다른 환자를 위해 버텨야 하나"라고 토로했다. 그는 "대형 업체들이 법을 어기지 않았더라도 환자를 유도하고 경쟁을 짓밟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 CVS의 '약국 폐쇄' 경고에도 반박했다. "법은 약국 폐쇄가 아닌 매각을 요구하는 것"이라며 “PBM을 소유하지 않은 월그린스 같은 대형 체인이 이를 인수하면 된다”고 말했다.
테네시 주 법안 공동 발의자인 민주당 소속 애프틴 벤 케네시 주 하원의원은 "이 싸움이 앞으로 수십 년간 이어질 대형 의료 재벌 해체의 전주곡"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역사적 변화의 시작을 보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