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전국 수백 개의 도시, 병원, 학교, 공공시설 등이 발행한 지방채(뮤니시펄 본드)를 최대 10억 달러(약 1조 3,500억 원) 규모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이 채권들 중 상당수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기관과 연결돼 있어 이해충돌 논란이 커지고 있다.
규모 자체가 전례 없는 수준
경제 전문 방송 CNBC가 트럼프 대통령의 금융 공시 자료를 분석한 결과, 그는 2025년 말 기준 807개 지방채 포지션을 보유했으며 평가액은 2억 4,070만~7억 9,760만 달러(약 3,250억~1조 780억 원)에 달했다. 이후 2026년에만 최소 243건을 추가 매입했으며, 9월 22일에도 48건의 신규 매입이 공시됐다. 주식과 달리 채권은 매입 내역만 공시되고 매도 내역은 보고되지 않는다.
이를 합산하면 총 1,000개 이상의 포지션에 300만~10억 달러(약 4,050억~1조 3,500억 원) 규모로 추산된다.
시카고 대학교 지방재정센터의 저스틴 말로(Justin Marlowe) 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드러난 지방채 규모는 내가 아는 한 전례가 없는 수준"이라며 "1억 달러만 해도 개인 투자자로서는 큰 규모인데, 10억 달러에 가까운 포트폴리오는 사실상 기관 투자자 수준"이라고 말했다.
정책과 투자가 겹치는 '아슬아슬한' 사례들
CNBC 분석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채권 보유와 행정부 정책 결정이 직접적으로 맞물리는 사례들이 다수 발견됐다.
석탄 발전소: 트럼프 대통령의 계좌는 2025년 2월 조지아 파워의 보웬(Bowen) 발전소 관련 오염 방지 채권을 5만~10만 달러어치 매입했다. 57일 후 트럼프 대통령은 해당 발전소를 포함한 수십 개 석탄 발전소에 더 엄격한 환경 규제 기준 적용을 2년간 면제해주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이후 그의 계좌는 조지아 파워의 셔러(Scherer) 발전소와 앨라배마 파워의 배리(Barry) 발전소 관련 채권을 최대 20만 달러 추가 매입했다.
전직 백악관 윤리 수석 변호사 리처드 페인터(Richard Painter) 미네소타 대학교 교수는 "오염 방지 채권의 신용도는 해당 발전소에 적용되는 규제에 달려 있다"며 "연방 정책이 규제 준수를 늦추면 시설의 경제성이 바뀐다"고 지적했다. 그는 "에너지부 장관이 이런 채권을 보유하는 건 허용되지 않겠지만, 대통령은 일반적인 이해충돌 법에서 면제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데이터센터·전력 인프라: 트럼프 대통령은 2025년 7월 데이터센터 건설 및 허가를 촉진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4개월 후 그의 계좌는 오마하 공공전력지구(Omaha Public Power District) 전기 수익 채권을 75만~150만 달러어치 매입하기 시작했다. S&P 글로벌 레이팅스는 해당 유틸리티의 전력 수요 성장이 향후 3년간 주로 데이터센터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병원·의료 기관: 트럼프 대통령의 계좌는 2025년 말 기준 병원 및 의료 시스템 관련 지방채 72개 포지션을 약 2,420만~7,630만 달러어치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은 향후 10년간 메디케이드(저소득층 의료보험) 예산을 약 9,000억 달러 삭감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해당 병원들의 재정 건전성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요인이다. 그럼에도 법안 통과 이후 피츠버그 기반 비영리 의료 시스템 UPMC와 휴스턴 지역 메모리얼 헤르만(Memorial Hermann) 등의 채권을 추가 매입했다.
백악관 "독립 기관이 관리, 트럼프 개입 불가"
백악관과 트럼프 조직 측은 해당 투자가 외부 독립 금융기관이 운영하는 재량 계좌를 통해 이루어지며, 트럼프 대통령과 가족은 "투자 방향이나 거래에 어떠한 영향도 줄 수 없다"고 해명했다.
CNBC도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 결정에 대한 사전 정보를 바탕으로 거래를 지시했거나 개인적 재무 이해관계가 특정 정책을 형성했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저스틴 말로 소장은 "외부 기관이 관리한다고 해서 특정 지방정부나 프로젝트의 채권을 개별적으로 보유하는 데서 비롯되는 의문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개별 채권을 일일이 선택하지 않고도 지방채 시장에 투자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상장지수펀드 등)이 있다"며 연방 정책이 특정 보유 채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의문을 피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불리한 방향의 채권도 있어
모든 채권이 트럼프 행정부 정책의 혜택 방향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으로 연방 자금 지원이 삭감되거나 추가 비용을 부담하게 된 지방정부 채권도 포트폴리오에 포함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계좌는 미네소타 주채권을 매입하기 15일 전, 연방정부가 해당 주에 대한 분기 메디케이드 지원금 2억 5,950만 달러 지급을 연기했다. 또한 미니애폴리스 공립학교 채권은 미네소타 대규모 이민 단속이 시작되기 10일 전에 매입됐다. 시 당국은 해당 단속으로 약 7억 달러의 경제적 손실이 발생했다고 추산했다.
지방채 시장 역대 최고 호황
트럼프 대통령의 채권 매입이 급증한 시기는 지방채 시장 역대 최대 호황과 맞물린다. 지방채 발행 기관들은 2025년 사상 최대인 5,800억 달러어치 채권을 발행했으며, 올해 8월까지도 4,085억 달러가 발행돼 전년 동기 대비 4% 증가했다. 발행 잔액은 1분기 기준 약 4조 5,000억 달러에 달한다.
힐탑 시큐리티스(Hilltop Securities)의 톰 코즐릭(Tom Kozlik) 전략가는 "이란 전쟁과 AI를 둘러싼 불확실성 속에서 투자자들이 위험을 줄이려 하고 있으며, 지방채는 그 확실성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또한 고금리 환경에서 연방 소득세가 면제되는 지방채의 매력이 고소득 투자자들에게 더욱 높아졌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행정 권력과 개인 재산의 융합이 트럼프 대통령 재임의 특징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1,000개가 넘는 지방채 포트폴리오는 또 하나의 잠재적 이해충돌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법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윤리적 논란은 피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