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극동 하바로브스크에 제2차 세계대전 승전을 기념하는 대형 조형물이 설치되면서 일본 정부가 즉각 철거를 요구하고 나섰다.
지난 4일 제막된 이 기념비는 높이 약 15m의 소련군 병사가 일본 왕실의 상징인 ‘국화문장’이 새겨진 국경 표석을 소총 개머리판으로 부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해당 표석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사할린섬 남부를 점유하며 북위 50도선에 세웠던 국경 표석을 본뜬 것이다. 이에 대해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5일 X(옛 트위터)를 통해 러시아어로 “국화문장은 일본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다”며 기념비 설치를 강하게 비판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번 사안이 “일본 국민감정과 관련된 문제”라며 정부 차원의 철거 촉구를 예고했고, 모테기 도시미쓰 외무상 역시 같은 날 “극히 유감”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러시아 측은 해당 기념비가 대일전 승리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기념하는 것임을 강조하며 일본의 요구를 일축했다.
양국 관계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급격히 얼어붙었다. 기시다 후미오 정부가 G7과 보조를 맞춰 대러 제재를 단행하자 러시아는 평화조약 협상을 중단했고,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 구축했던 북방 영토 관련 협상 틀도 사실상 붕괴했다.
러시아는 지난해 9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의 날’ 명칭에 ‘군국주의 일본에 대한 승리’를 추가하는 등 대일 압박 수위를 높여왔다. 지난달 13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의 실효 지배지인 에토로후섬을 현직 대통령 최초로 방문해 일본의 거센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러시아의 행보에 강경 대응하고 있으나, 에너지 안보를 고려하면 관계를 전면 단절하기는 어려운 처지다. 일본은 전체 LNG 수입량의 약 9%를 러시아 사할린-2 사업을 통해 조달하고 있으며, 관련 기업들이 해당 사업의 지분을 유지하고 있다.
중국과의 외교적 갈등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러시아와도 전선을 확대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분석도 나온다. 영토 문제와 역사적 상징물을 둘러싼 양국의 갈등이 에너지와 외교적 현실론 속에서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