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9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대한 미국의 제재에 깊은 우려를 표하고, 재판소가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도록 필요한 지원을 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제재는 ICC 기관 전체를 대상으로 금융서비스와 기술기업 접근, 달러 사용 등을 차단하는 조치다.

다카이치 총리는 이날 X(옛 트위터)에 일본이 국제사회의 법의 지배를 일관되게 중시한다며 “그 역할을 맡는 ICC를 지지한다”고 썼다. 일본인인 아카네 도모코 ICC 소장 및 관계국과 소통하면서 재판소를 지원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앞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제재를 발표하면서 동맹국에도 동참을 요구했다. 동맹국이 따르지 않더라도 미국은 ICC 해체를 위한 압박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제재에 따라 ICC는 미국 기반 금융서비스와 기술기업에 대한 접근이 차단되며 달러 사용도 제한된다. ICC와 거래하는 미국 기업과 개인에게는 기존 거래를 정리할 수 있도록 6개월의 유예기간이 주어졌다.

이번 조치는 재판소의 자금 결제와 업무 시스템 등 운영 기반을 압박한다. 미국은 ICC가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전쟁범죄 의혹을 수사하고 이스라엘 지도부에 체포영장을 발부한 것을 문제 삼아왔다.

다카이치 총리의 대응은 지난 8월 미국이 아카네 소장을 개인 제재 대상으로 지정했을 때와 달라졌다. 당시 총리는 제재 발표 이튿날 기자들의 질문에 매우 유감스럽다고 답하는 데 그쳤고, 일본 여야 의원들 사이에서는 정부 대응이 미온적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번에는 국무부의 제재 발표 약 10분 뒤인 9일 오후 11시25분(일본 시간)에 다카이치 총리의 지원 입장이 X에 올라왔다. 마이니치신문은 지난 8월 일본 안팎에서 저자세라는 비판을 받은 점을 의식해 신속한 입장 표명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외무상도 총리의 게시물에 이어 미국의 결정이 일본의 일관된 입장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밝혔다. 다만 ICC가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으려면 재판소와 당사국들이 ICC가 안고 있는 과제에 대처하고 적정하게 운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제재 발표는 ICC 판사를 지낸 남아프리카공화국 법률가 나비 필라이의 노벨평화상 수상 발표 몇 시간 뒤 나왔다. 필라이는 10일 오슬로 노벨평화센터 행사에 화상으로 참여해, 판사들이 사법적 판단을 내렸다는 이유로 한 나라가 제재를 발표했다며 “전례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을 기대해 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9일(현지시간) 뉴욕주 시러큐스 중간선거 유세 등에서 수상자 선정에 불만을 드러냈다. 자신이 여러 전쟁을 막았다고 주장하며 이번 결정을 노벨위원회의 “지울 수 없는 오점”이라고 비난했다.

러시아도 ICC 관계자들을 겨냥한 조치에 나섰다. 러시아 검찰은 8일 아카네 소장과 카림 칸 전 수석검사 등 9명의 신병 인도를 네덜란드 등 여러 나라에 요청했다고 밝혔다.

아카네 소장은 2023년 우크라이나 아동 불법 강제이송 혐의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한 재판부에 참여했다. 러시아는 자국이 ICC 비당사국인데도 재판소가 러시아 국민을 불법으로 기소하고 체포영장을 발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오자키 마사나오 일본 관방부장관은 9일 러시아의 신병 인도 요청에 대해 “부당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